안녕하세요 아빠 상어 입니다.
오늘은 최근에 제가 조금 힘들었던 일이 있어서 이래저래 위로를 얻고자 다시 읽어본 글들을 올립니다.
삼십대 중반이란 나이에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는 두려움과 나 때문에 고생하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고 리스크를 선택한 것에 대한 후회...
이 모든 것을 끝낸 후에 과연 다시 제대로된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
이런 걱정들 속에 사로잡혀 있다보면 나도 모르게 사람이 울쩍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저 처럼 유학을 하건, 사업을 하건, 퇴사를 하건 모든 선택과 도전에는 그에 필히 따르는 대가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노력해서 이 대가를 모두 치루기 전까지는 그 결과를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발 이 힘든 시간이 저를 기존의 안락함이라는 껍질을 벗어내고 다음 10년을 살아 갈 수 있는 새로운 껍질을 얻어낼 수 있는 발판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기도해봅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하루하루 힘내야겠죠? 그래야 또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항상 믿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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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소타대학에 유학중인 아나운서 손석희‘늦깎이 유학생활’
“어려운 국내 소식듣고 더 악착같이 공부합니다”
지난해 4월 훌쩍 미국 유학 떠났던 MBC간판급 아나운서 손석희씨. 방송인으로서 적잖은 인기를 구가했을 뿐 아니라 공정방송을 위한 활발한 활동으로 시청자들에게 깊이 각인된 바 있는 그는 현재 가족들과 함께 미네소타에 머물며 ‘평범한 학생’으로 공부에 전념하고 있는 중이다. 현지 생활에 대해서는 한번도 국내에 공개하지 않았던 그가 1년반의 침묵을 깨고 〈여성동아〉에 상세한 근황을 털어놓았다.
안녕하세요? 손석희입니다. 저는 지금 미네소타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학생’이 아니라 객원 연구원(visiting scholar) 자격으로 왔지요. 다 늦은 나이에 속말로 가방 끈 늘리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거든요. 다만 내가 관심있는 분야에 대해서 시간이나 여건에 쫓기지 않고 공부를 하다가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학교측에서도 연구실을 제공하는 대신 부정기적으로라도 한국 언론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발표를 해줬으면 하는 정도였지요.
그러다가 특히 IMF 환란이 터진 다음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금쪽 같은 달러를 쓰면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학위를 밟기로 한 것입니다. 또 저는 지금 국제 로타리 장학생 자격으로 와 있기도 한데 로타리에서도 제가 학위과정으로 들어가길 권했습니다. 고민 많이 했지요. 마흔 넘은 나이에 남의 나라에서 내가 왜 이러나 싶기도 하고…. 결국 작년 말에 학과장을 찾아가 얘기했습니다. 내가 학생이 되려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열심히 해보자더군요. 그래서 그때부터 토플 공부했습니다.
20대 때 입사하려고 들여다봤던 토플책을 40대가 돼서 입학하려고 다시 들여다본 셈이지요. 요구하는 점수가 높은 편이어서 고생 좀 했습니다. 학교 측에서는 여러가지로 신경을 써줬습니다. 원래 외국학생은 가을학기부터 입학이 허용되는데 저는 봄학기부터 바로 시작했고 일이 잘 되려니까 첫학기 등록금은 학과에서 면제해 줬습니다. 다음 학기부터는 로타리 재단에서 장학금이 나오니까 이 환란의 시대에 그래도 체면은 좀 세운 편입니다.
‘남의 말’로 공부하는 어려움
저의 주된 관심분야는 방송에 미치는 시청자 단체의 영향력과 대안 방송의 실천입니다. 방송사간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시청자들이 방송을 감시해야 할 필요가 커지고, 또 권력이나 거대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방송이 필요하다고들 하지요. 우리나라에서도 논의의 진척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미국에선 실제로 시청자 단체의 영향력도 있고 대안방송도 존재하기 때문에 조금 자세히 들여다볼 참입니다.
제가 다니는 미네소타 주립대는 원래 미국에서 저널리즘학을 처음 본격적으로 도입한 학교여서 그 명성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편이지요. 다만 제 고집하고는 안 맞는 부분도 많아요. 예를 들면 저는 공영방송론자에 속하는데 미국의 저널리즘은 아무래도 상업방송 쪽으로 치우쳐 있으니까 수업의 흐름도 자연스럽게 그쪽이지요. 거기 휩쓸리지 않으려다 보면 갈등이 많습니다.
한편으론 우리 방송을 생각하면 씁쓸하기도 하고요. 정부가 방송을 간섭하려 들고 심지어 아직도 정부가 신문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분명히 후진국입니다.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나라가 어려운 만큼 언론도 되도록이면 어두운 뉴스를 자제했으면 했다는데 얼핏 5공화국 때 생각이 나더군요. 그런 언론관으로는 개혁 못합니다. 수업시간 중에 세계언론구조라는 시간이 있는데,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의 언론구조와 우리의 그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데 한편으로 놀라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지난 3월에 첫학기가 시작됐고 지금은 여름학기중인데, 사실은 학기 시작한 이후부터 어떻게 살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저 매일 읽고, 리포트 써내고, 시험 치르고…. 그렇게 살았지요. 공부하면서 제일 부러웠던 건 미국학생들이었습니다. 자기나라 말로 공부하니까요. 그런데도 요령만 피우는 학생들을 보면 좀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치 예전의 저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말로 공부할 수 있었을 때 실컷 할걸’이라며 후회하고 지내지요.
저도 영어공부는 예전에 하느라고 했는데 수업시간에 쓰는 영어는 아무래도 일상언어하곤 다릅니다. 어떤 학생은 첫 수업시간이 ‘대중문화와 매체’라는 시간이었는데 교수가 자꾸 맥도널드 얘기를 하기에 ‘맥도널드 햄버거 집이 워낙 흔하니까 아마 그것도 대중문화의 범주 안에 넣어서 얘기하나보다’하고 혼자 억지 해석을 했는데, 알고보니 무슨 대중문화 이론서의 저자 이름이었답니다. 그렇게 웃지 못할 일도 많지요. 그리고 특히 저널리즘학과는 말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지 교수들도 외국학생을 특별히 봐주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미국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직장을 다니다가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원은 특히 그렇고. 우리처럼 1년 재수라도 하면 큰일나는 분위기가 아니지요. 제가 있는 학과도 마찬가집니다. 지역방송에 다니면서 대학원으로 들어온 사람도 있고, 신문사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저처럼 늦게 들어온 사람은 없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이곳에서 방송현장에서 일하다 뒤늦게 진학한 학생들에게 배울 게 별로 없어요. 미국은 방송사라 해도 규모가 우리처럼 크진 않거든요. 우리처럼 뉴스, 쇼, 드라마, 교양 프로그램까지 한 방송사에서 모두 만드는 게 아니니까요. 여긴 제작기능이 대부분 분리돼 있지요. 쉽게 말하면, 방송사 로비에 앉아 있으면 온갖 연예인들 다 보는 우리하고는 다르다는 겁니다. 자연히 직업상 경험은 제가 더 많이 했으니까 이 친구들이 저한테 묻는 게 더 많습니다.
다른 학교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학교에서 느낀 바로는 학생들이 같은 학과라 해도 동아리 의식이 없어요. 우리같으면 벌써 학생 대표자 뽑아서 수련회도 가고 술도 마시고, 뭐 그럴 텐데 이 친구들은 그저 수업만 달랑 듣고 가면 끝이에요. 지난 번에 시내에 있는 방송 박물관에서 현장수업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모처럼 바깥에서 수업을 하니까 서로들 얘기를 하게 됐는데 가만 보니 서로 이름을 다 모르는 겁니다. 그때가 이미 학기말이었는데… 개인주의도 좋지만 너무 정이 없지요.
하긴 이 친구들 사는 걸 보면 서로 모여서 수련회 같은 데 가는 문화는 생길 수도 없어요. 모두들 제 돈으로 벌어서 학교 다녀야 하니까 수업 끝나면 일터로 가거나 밀린 공부 해야지요. 물론 부모가 학비를 대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학비를 제가 벌거나 최소한 용돈이라도 제 손으로 벌어야 합니다. 미국 학교들이 여름방학이 길고 겨울 방학이 거의 없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 여름에 파트타임 직업이라도 제대로 잡아서 돈을 벌라는…. 겨울이 혹독한 이곳 미네소타도 마찬가집니다. 추울 때 공부하고 더울 때 돈 벌라는 얘깁니다.
그렇다고 우리 나라 학생들을 이들과 비교해서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여건이 확연히 다르니까요. 어찌보면 우리 학생들이 더 안됐습니다. 일자리란 게 많지도 않고 또 뻔한 일들이니까요.
IMF 이후 생활비 최소한으로 줄여
한국의 친지들과는 주로 E메일을 이용해 연락하고 있습니다. 아나운서국 후배들도 가끔 E메일로 소식을 전해 오지요. 문화방송 노동조합에서도 매달 노조 소식지를 보내 오고 있어서 회사 돌아가는 사정은 잘 압니다. 사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노조 ‘탓’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예전에 파업 때문에 영등포 구치소에 잠깐 들어가 있을 때, 제 방 위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비행기가 지나갔거든요. 그때 그 비행기 볼 때마다 “나도 기회가 되면 한 번쯤 외국에 나가 있어 보리라”고 생각하곤 하다가 결국 실천에 옮긴 거니까… 그때 옆방에 있던 사람하고는 아직도 편지 주고받으면서 사람의 앞일이란 참 알 수 없는 거란 얘길 합니다.
미국에 머물면서 회사의 특집 프로그램을 두 번 만들기도 했습니다. 작년 4월에 회사를 떠나올 때 이득렬 사장께서 “나가서 그냥 시간 보내지 말고 프로그램 제작해서 회사에 기여를 해보라” 하시기에 저도 해볼 만할 것 같아서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가 미국 와서 그야말로 몇 달 동안 고생 좀 했지요.
오자마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습니다. 카메라맨과 현지 섭외담당, 그리고 저까지 달랑 세 명이 이 넓은 땅을 정신없이 돌아다녔습니다. 그때 있었던 일들 얘기하자면 하룻밤으로도 모자랍니다. 방송생활 13년을 하면서 있을 수 있는 악조건은 모조리 다 겪은 느낌이에요.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손석희의 미국탐험>이었는데 순수 제작 기간 두달 남짓 동안에 열 편을 만들어서 방송했습니다. 다행히 반응이 좋은 편이어서 지금도 큰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금년 여름엔 로스앤젤레스 지사에서 서울 본사와 위성으로 연결한 <남북 이산가족, 이제는 만나야 한다>에 3일 동안 참여했지요. 다행히 첫학기가 끝난 직후여서 가능했는데 앞으로는 그런 기회는 없을 것 같군요.
그리고 에 한달에 두 번쯤 미국 뉴스를 전하고 있는데 학기중에 시간에 쫓기기는 하지만 저도 공부가 되고 또 제 나름의 시각으로 뉴스를 분석해 보내는 재미도 있어서 계속하고 있습니다. 미국얘길 하다보면 좋은 말이 안 나와서 ‘아직도 모가 났다’는 얘길 듣긴 합니다만….
어떤 분들은 외국에 나가면 한국소식은 딱 관심을 끊고 그곳 생활에만 몰두한다고 하는데 전 그런 모습이 좋게만 보이지 않습니다. 또 직업적으로도 그럴 순 없지요. 나라 사정 돌아가는 걸 알고 있어야 돌아가서도 일에 지장이 없을테고요. 주로 인터넷을 통해서 신문을 본다든가 합니다.
특히 IMF 체제 이후에는 한국 소식에 더 매달리게 되는데 해고사태가 번지면서 가슴이 아픕니다. 이 난국에 여기 나와 있는 게 죄스럽기도 하고….
제가 나올 때가 한보 사건 관련 청문회가 한창 열릴 때였습니다. 김현철씨가 청문회에 나온 날 저는 떠나왔거든요. 그리고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특집 프로그램 만드느라 여름을 정신 없이 보내고 나서 이곳 미네아폴리스에 자리를 좀 잡는가 하는 사이에 환란이 터졌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라 경제 걱정은 두 번째였고 당장 제가 더 급했습니다. 자고 나면 환율이 뛰었으니까요. 환율이 달러당 2천원까지 뛰었을 때는 정말 참담했지요. 그나마 저는 환율이 뛰기 전에 미리 송금받은 돈이 있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여기 유학생들도 마찬가지지만 더이상 줄일 수 없을 때까지 생활비를 줄였습니다. 일부 학생들은 여전히 낭비를 한다지만 제 주위에선 그런 학생은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여기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건 그래도 운이 좋은 거지요. 해고자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고 세상이 뒤숭숭한데 여기서 죽는 소리 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힘든 국내 사정을 뉴스로 들으면서 앞으로 공부를 마치고 돌아갔을 때 나라사정이 어려우면 방송도 그에 걸맞게 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전부터 가졌던 목표는 ‘좋은 방송’을 하는 것이었으니까 돌아간다고 해서 특별히 행보가 바뀔 것도 없지요.
떠나 오기 전 노조활동 등을 통해 ‘강성’이라는 이미지를 보였던 저에게 ‘연착륙’을 하라는 충고를 많이 들었지요. 좀더 두리뭉실하고 너그러워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하는 얘기인지 모르겠는데 제가 미국 간다니까 주위 사람들이 저보고 가면 골프부터 배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갔다오면 모난 생각은 좀 미뤄두고 ‘성숙’된 모습으로 살란 얘기 같았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저는 여기서도 골프장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안 갑니다. 골프를 못 배워서 사람 사귀는 게 불가능한 사회라면 이미 썩은 사회이므로 혼자 지내는 쪽을 택할 겁니다. 그리고 저는 기본적으로 제가 모가 났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몇 가지 까다로운 걸 빼면 저는 아주 두리뭉실한 사람이거든요, 하하….
주변의 충고는 그 ‘몇 가지 점’에서 이른바 ‘연착륙’을 하라는 것인데 그것마저 양보하면 저란 사람은 이미 사회적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 와서 변한 가정생활이요? 글쎄요, 남들은 이런 데 나와 있으면 가정생활이 많이 변한다는데 제 집사람 말에 의하면 전 변한 게 없답니다. 슈퍼마켓 가는 걸 당연히 여기게 된 것 정도만 빼면 사실 전 그냥 제 버릇대로 살고 있지요. 집안에서 좀 게으르다든가, 자연환경이 이렇게 좋은데도 산책 나가는 걸 싫어한다든가걖?. 그래도 학기 시작 전까지는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요즘은 한밤중에 들어가니까 서울에서 회사 다닐 때나 진배 없지요. 원래 유학생들은 그 가족들이 더 고생이라고 하더군요.
금요일 밤쯤에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를 비디오로 빌려다 함께 보는 게 유일한 낙입니다. 엄살 같지만 주말이 따로 없습니다. 수업 없는 날은 밀린 리포트를 써야 하기 때문에 토요일과 일요일도 대개 학교에 있어야 하지요. 그래도 아주 가끔은 다른 유학생 가족들하고 호숫가 공원에 가서 점심도 해먹고 그럽니다. 미네소타는 워낙 호수가 많아서 경치 좋은 곳은 많습니다. 미네소타란 이름이 아메리카 원주민 말로 ‘물의 땅’이란 뜻이라더군요.
한국에 있을 때부터 위장병을 앓았는데, 여기서도 위장병으로 두어 번 고생했지요. 그건 일종의 지병이니까…. 알고 보니 여기 유학생들도 위장병 환자가 많아서 어떤 때는 제가 꽤 아는 척을 하고 돌팔이 의사 노릇을 할 때도 있습니다. 스트레스도 받고 음식도 안 맞고 해서 그런 것 같아요.
제가 우리나라에 있을 때는 평생동안 먹은 햄버거 개수가 두세 개쯤 될 겁니다. 그 정도로 싫어했거든요. 그런데 여기와서는 셀 수도 없이 많이 먹었어요. 싸고 편하니까. 그게 위장에 좋을 리가 없지요. 누구 얘길 들어보니까 위장병 있는 사람치고 성격 좋은 사람이 드물다던데, 제가 ‘연착륙’을 못해서 그런가 보지요.
생활환경은 미국 내에서 이만큼 좋은 곳도 없을 겁니다. 각 부문 점수를 매기면 미국 중서부에서 1위라고 합니다. 우선 호수와 나무가 많고 인구수는 2백만 정도로 도시가 작지 않은 편이지요. 미네아폴리스와 주도인 세인트폴이 붙어 있어서 쌍둥이 도시로 불리는데 그 사이로 미시시피 강이 흘러서 경계를 이루지요. 미시시피 강이라고 해봐야 여긴 상류여서 넓이가 한강의 5분의 1정도밖에 안됩니다.
게다가 범죄율이 미국 대도시 중에 최하위일 정도로 안전합니다. 다만 겨울에는 가끔 영하 40도까지 떨어질 정도로 춥고 눈이 많이 옵니다. 위도가 북만주와 비슷해서 한창 추울 때는 유학생들끼리 농담을 하지요. 조상들은 이런 추위에 독립운동이라도 했다지만 우린 뭐하고 있는 거냐고요.
다행히 우리 애들은 처음부터 잘 적응한 편입니다. 큰애(구용·10)가 처음 학교 간 날 하루종일 걱정했지요. 그런데 갔다와서 하는 말이, 내일도 또 가고 싶다는 거예요. 작은 애(구민·6)는 처음에 적응을 못해 제 엄마 마음을 좀 아프게 했지만 그래도 금방 적응한 편입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두 아이에게 차이점이 있습니다. 큰 애만 하더라도 초등학교 4학년이 되니까 자신과 다른 애들이 피부색이 다르다는 걸 의식하는데 작은 애는 전혀 그런 게 없어요. 그만큼 그 나이에는 선입견없이 어울리는 게 자연스러울 수 있지요.
아빠보다 현지적응 빠른 두 아들
이곳 학교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아주 철저한 데가 있습니다. 가령 우리 아이처럼 외국학생이 들어가면 언어 교습을 위한 교사를 따로 붙이고 정기적으로 학부모와 회의를 합니다. 면담할 때 필요하면 통역까지 부를 정도로 철저하지요. 수업시간도 일방적인 교습방법이 아니어서 적응하기가 더 쉬운 것 같습니다.
아내(신현숙·전 MBC 아나운서)는 아이들 건사하기도 바쁩니다. 어떤 때는 자기가 전문 운전기사가 다된 것 같다고 합니다. 아이들과 저를 학교까지 데려다 주면서 왔다 갔다 하면 하루가 다 갈 때도 있지요.
그리고 틈틈이 커뮤니티 컬리지에 가서 수업을 듣는데 여기 커뮤니티 컬리지는 거의 무료인데다가 수업내용도 괜찮다고 합니다. 사실은 저보다도 더 바쁘지요. 저야 공부한다는 핑계로 집안일에도 요령을 피우지만 집사람이야 그럴 수도 없고. 아내는 한국에 있을 때 프리랜서로 교육방송 등에서 방송일을 짬짬이 했는데, 귀국해서도 일을 또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요.
저 자신 한국에 돌아갔을 때 무엇을 해야 할까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습니다. 전 원래 먼 미래까지 미리 계획을 세워놓고 사는 타입이 아닙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복직해서 주어진 일을 해야겠고, 혹시 기회가 된다면 시간강사라도 해봤으면 합니다. 제가 떠나올 때 주위 사람들이 ‘혹시 딴 생각 있어서 잠시 나가 있겠다는 것 아니냐’는 뒷얘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계산적이지 못합니다. 잘못된 길이 아니라면 뭐하러 눈치 보면서 돌아가겠습니까. 제 직업적 전망을 방송과 떼어놓고 세운다는 건 힘듭니다. 물론 나이 마흔이 넘으면 앞일에 대해 장담해선 안된다지만 전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방송에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프리랜서 얘기를 하는 분도 있는데, 하려고 했으면 벌써 했지 지금 와서 그럴 생각도 없어요. 어차피 방송을 돈 벌려고 했던 건 아니니까. 훗날 ‘좋은 방송’을 만드는 데 직원 신분보다는 프리랜서 신분이 더 유리할 때가 온다면 미련없이 그렇게 하겠지만, 제가 보기엔 제가 정년퇴직할 때까지도 그런 상황이 올 것 같진 않을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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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내가 지각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도 남보다 늦었고 사회진출도, 결혼도 남들보다
짧게는 1년, 길게는 3∼4년 정도 늦은 편이었다.
능력이 부족했거나 다른 여건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이렇게 늦다 보니 내게는 조바심보다,
차라리 여유가 생긴 편인데, 그래서인지 시기에 맞지 않거나,
형편에 맞지 않는 일을 가끔 벌이기도 한다.
내가 벌인 일 중 가장 뒤늦고도 내 사정에 어울리지 않았던 일은
나이 마흔을 훨씬 넘겨,
남의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결정한 일일 것이다.
1997년 봄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가면서,
나는 정식으로 학교를 다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어느 재단으로부터 연수비를 받고 가는 것도 아니었고,
직장생활 십수년 하면서 마련해 두었던 알량한 집 한채 전세 주고,
그 돈으로 떠나는 막무가내식 자비 연수였다.
그 와중에 공부는 무슨 공부. 학교에 적은 걸어놓되,
그저 몸 성히 잘 빈둥거리다 오는 것이 내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졸지에 현지에서 토플 공부를 하고 나이 마흔 셋에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된 까닭은 뒤늦게 한 국제 민간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얻어낸 탓이 컸지만, 기왕에 늦은 인생,
지금에라도 한번 저질러 보자는 심보도 작용한 셈이었다.
미네소타 대학의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연구실 구석에 처박혀
낮에는 식은 도시락 까먹고, 저녁에는 근처에서 사온 햄버거를
꾸역거리며 먹을 때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내 연배들을 생각하면서
다 늦게 무엇 하는 짓인가 하는 후회도 했다.
20대의 팔팔한 미국 아이들과 경쟁하기에는
나는 너무 연로(?)해 있었고 그 덕에 주말도 없이
매일 새벽 한두시까지 그 연구실에서 버틴 끝에 졸업이란 것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무모했다.
하지만 그때 내린 결정이 내게 남겨준 것은 있다.
그 잘난 석사 학위? 그것은 종이 한장으로 남았을 뿐,
그보다 더 큰 것은 따로 있다.
첫 학기 첫 시험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한 뒤,
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억울함에 겨워 찔끔 흘렸던 눈물이 그것이다.
중학생이나 흘릴 법한 눈물을 나이 마흔 셋에 흘렸던 것은
내가 비록 뒤늦게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만큼 절실하게 매달려 있었다는 방증이었기에
내게는 소중하게 남아있는 기억이다.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인생을 살더라도
그런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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